아주아주 예전에, 거의 갓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사랑하고 존경하던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기대가 컸지만 그가 보기에 나의 대학 생활은 그리 훌륭하지 않았다. 성실하게 공부하는 삶도, 꾸준히 어떤 능력을 키워가는 삶도 아니라고 평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느날은 그가 나를 불러 그림을 그렸다. 한 점에서 두 개의 선이 시작되는데, 서로 미세한 각도의 차이가 있다. 두 개의 선을 길게 그어나가면 예각이 그려지는데, 두 개의 선 사이의 차이가 점점 벌어진다. 어느 순간 두 선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멀어진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지금의 미세한 차이가 나중의 큰 차이가 된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은 동일하게 사는 것 같은 두 사람이, 어떠한 미세한 차이가 나는 삶을 살았고, 나중에는 서로 아주 많이 차이가 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였다.


불행히도, 그 이야기는 내게 어떤 피해의식이 되었던 것 같다. 가까이 지내는 어떤 이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볼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던 순간순간에 대한 부정처럼 느껴져서, 마치 내가 그 차이나는 삶 중에서 결국 안 좋은 쪽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난 결국 그 선생님과는 더 이상 연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한편으론 늘 그림이 마음 속에서 존재하여, 내가 정말 안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열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하고, 어떤 도전에 실패할 때마다 주저앉을 때마다 마치 그녀의 가설이 입증된 것일까,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를 많이 비하했었다.


아마도 누군가는 그러한 그림을 보았을 때, 그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분명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좁은 식견 속의 어떤 망상, 부족한 자신감, 그에 비해 허황된 잣대와 사실은 알고보면 나에 대한 과장된 기대, 나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마음과 그 반대 양상으로서의 실망감같은 요인들은 내 속에 아주 답답한 렌즈를 만들었다. 그래서 난 그 그림과 이야기를, 그저 경각심을 주기 위한 목적뿐이었을 그 이야기를 너무 무겁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최근의 어느 순간 나는 그 그림이 인생의 아주 일부분임을 알게 되었다. 우선, 사람들에게 그 직선은 결코 반듯한 직선일 수 없다. 아주 예쁘게 예각을 이루는 두 직선이 곧게 뻗어나가는 그런 직선은 인생의 참모습일 수 없다. 선은 구불구불하거나 위로 갔다가도 아래로 가고, 앞으로 갔다가도 뒤로 갈 수 있다. 그렇기에 곧게 뻗은 직선은 불가능하거나,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둥근 원의 곡선을 확대하면 직선이 존재하지만, 곡선의 일부분인 것처럼. 그리고 그 방향 또한 일정하지 않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반듯하게 같은 방향을 가는 어떤 직선은 삶의 모습일 수 없다. 그리하여 어떠한 '차이'는 가정한대로 예측한대로 나타나긴 힘들다. 위에서 뻗어나가던 직선이 아래로 갈 수도 있고,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수렴할 수도 있고, 차이가 나다가도 안 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차이가 나는 어떤 직선에서 위의 직선이 되든 아래의 직선이 되든, 그 어느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은 결코 쉽게 내려지지 않는다. 서로 어떤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어느 직선이 더 우위에 있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극단적으로는, 모두 다 좋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부처님조차도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을 나누듯이 좋은 길과 안 좋은 길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답은 쉽게 내리기 어렵다. 인생은 종교의 길처럼 절대자가 제시하는 답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대부분의 경우, 각각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만약 더 우월한 직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길을 만드는 선택은 자기 그릇따라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 그릇이 그러할 뿐인데,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 그조차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내 머릿속에 있었던 인생길에 대한 그림을 그렇게 수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누군가는 이를 '정당화'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평균적으로 선택에 의해 사람들의 인생이 달라지는 걸 인정하라며, 그리고 더 나아보이는 삶이 있다는 걸 인정하라며 말이다. 사실 정형화된 예각의 그림이 답이라고 생각하면 내 자신이 매우 불행해질 것도 사실이기에, 그러한 답을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평가하기 어려운 삶의 여러 변수들 속에서 각자의 선택을 내리며 그 결과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다는 게 더 진리에 가깝지 않을까? 적어도 최초를 포함한 몇몇 선택들을 통해 벌어지는 어떤 차이가 내 삶을 모두 결정한다는, 그러한 인식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중요하게 느껴진다. 힘든 선택, 덜 힘든 선택은 있을지 몰라도, 또 어떠한 길은 좀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인진 몰라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선택을 하고자 용기를 내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난 예각의 예쁜 직선 그림을 꾸불꾸불한 그림으로, 수정하기로 했다. 내 삶을 더 개방하고 더 자유롭게 하고, 선택들을 용서하고, 용기를 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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