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문제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수능 '법과 정치' 문제풀이를 보게 됐다. 정책결정과정이나 시민사회에 관한 지문이 나오고 그에 대한 해설을 담은 선택지 중 옳거나 틀린 지문을 찾는 객관식 문제였다. 언젠가 나도 풀었을법한 익숙한 문제의 형식이었고 익숙한 풀이였다. 나도 한때 수능 과목 '정치'를 선택하여 비슷한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났다. 정치학 연구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나로서 지금 보면 좀 풀만하려나 싶어서 계속 보게 됐는데, 저 정도면 풀만한데 싶어서 신기했다. 하지만 보는 내내 좀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이런 형식밖에는 안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간 이후 거의 20년이 가깝게 지났으니, 문제를 칠판에 띄우는 방식이라든지 그래픽이라든지 하는 기술 자체는 발전했지만, 지문의 내용이나 지문을 해석하는 방식, 답을 찾는 방식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예전에 그랬듯, 수능 선택과목은 '암기과목'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여겨지는 듯 하다. 여러가지 단편적인 지식을 이용해서 지문을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그와 맞거나 맞지 않는 '이미 주어진' 객관식 지문 중 몇 개를 선택하는 방식. 그러한 형식의 문제를 잘 풀기 위해선 열맞춰 짜여진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우선이 된다. 암기한 지식을 꺼내어 잘 이용할 수 있는지가 '응용'의 방식이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본 문제는 이렇다. 부안 핵폐기물 문제와 관련된 지문이 주어진다. 지문 속 문장에 나온 정당, 주민, 국회, 지방자치단체 등의 행위자에 밑줄이 그어지고 선택지는 그 행위자의 특성에 관해 옳거나 틀린 부분을 찾게끔 주어진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이런 것이다. 정당은 공직을 추구한다, 주민은 사익집단이 아니다, 정책결정기구에는 지방자치단체가 포함이 된다, 시민단체는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고 정당은 정치적 책임을 진다.... 그리고 해설은 이러한 관계를 도식적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잘 구별하라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정보를 잘 외우고 기억해서 '꺼내서' 잘 배열한다면 그 문제를 맞출 수 있다.
여기에서 드는 의문은 이것이다. 이 문제는 그 지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문제인가 아니면 각 정보를 외우고 화살표로 짝짓기하는 능력을 보는 문제인가? 이 문제를 푸는 학생들 중에서, 부안 문제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문제를 푸는 학생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기계적으로 이 단어가 나오면 이 정보, 저 단어가 나오면 저 정보.. 이렇게 연결해서 단편적으로 문제를 푸는데 집중하지 그 의미 자체가 과연 무엇일까, 현실에서 어떻게 중요하고 어떻게 구현되는 걸까, 해당 지문의 사회현상은 왜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각각의 입장은 어떻게 조정되는 걸까 등의 이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러한 객관식 문제를 1분-2분 내로 풀어야 한다면,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치이다. 그저 문제의 정답을 찾아서 그 문제를 성공적으로 풀어야 줄세우기에서 앞에 설 수 있고 그래야 입시교육 최대의 목표인 '대학입시'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정보를 숙지하는 것, 그것을 잘 꺼내어 이용하는 것 자체는 정말 중요한 능력이다. 응용은 결국 암기/모방 등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이 모든 능력 평가의 기준이 된다면 그러한 상황은 얼마나 안타까운가? 한창 뇌가 말랑말랑한 시기의 학생들이 그러한 객관식 문제를 푸는데 시간을 투입한다는 게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주어진 정보는 너무나 단편적이다. 정당은 공직을 추구한다는 게 맞지만, 그거 자체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다는 것 이상으로 어떠한 의미와 중요성을 갖는가? 정치적 책임을 진다는 건 어떤 거지? 왜 그래야 하는거지? 부안 문제는 왜 문제가 되었고, 어떻게 해결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까? 이런 문제에 정답이 있을까? 대학 이후의 삶에서는 계속해서 정답이 없는 문제들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데 수능 문제는 도식화되어 있는 정답만을 요구한다.
예전에 홍세화씨의 책에서 나온 내용이다. 한국 교육의 최대 목표는 줄세우기라는 것이다. 그 예로 나온 게 다음의 문제였다. "다음 국가 중 동성애 결혼을 허용한 국가는 어디인가?" 뭐 이런 문제. 도대체 이 문제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걸 풀 시간에, 동성애 결혼을 허용한다는 것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왜 찬반이 존재하는지, 뭐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학생의 사고능력에도 도움이 되고, 뭐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에도 더 발전적이지 않을까? 위에서 이야기한 '법과 정치' 문제를 보는데 가슴이 콱 막힌 것 같았다. 아 이건 아예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구나. 심하게 말하면, 생각을 차단하는 게 목적인 문제구나.
또한 나 또한 저러한 문제를 잘 풀어서 좋은 대학을 간, 입시에 성공했다는 사람이었던 거구나 싶기도 했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교수님들은 끊임없이 비판적 사고를 강조한다. 하지만 참 애초에 배운 적이 없고 그렇게 살지도 않았던 한국의 우등생들에게는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유학을 간 한국 학생들이 시키는 것은 잘 하지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거나 이론을 세우는 것, 독창적인 연구를 하는 것에는 많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식을 풍부하게 배운 적이 없고 새로운 생각을 차단하는 교육을 받았는데 어떻게 사람이 쉽게 바뀌겠는가? 소수의 돌연변이들이 아니고서야...
한편으로 나는 결국은 그러한 방식이 싫어서 이 길을 걷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너무나 고전하고 있지만 이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율성을 발휘해야 하는 이 길을 선택한 게 내딴에는 탈출의 길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여전히 내가 정답을 찾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서 내 자신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러한 방식으로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도 돌아보게 됐다.